<W 기고> 미개한 조선과 개화 한 일본의 접점이 된 조선 통신사 · 修信使 (3) = 한국이 말하지 않는 한일 역사
일본을 방문한 조선 修信使 대표 김기수 (金綺秀)의 이야기 구키 류이치는 해외 유학파이었다. 당시의 일본은 해외 유학파가 1 만명에 달하는만큼 유능한 인재가 넘쳐나고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의 막부 시대부터 이미 대규모로 인력을 서양 열강에 유학시키고 있었다.

막부 휘하 번 (제후가 통치하는 영토)는 클랜 나름대로 중앙의 막부에 알리지 않고 인재를 해외에 유학시킬 정도로 해외 유학의 열기가 뜨거웠다. 당시의 일본은 수많은 해외 유학파 인재들이 사회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란 것도 실은 그 이전에 막부가 깔아 놓은 레일 위를 그대로 달렸다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 할 수있다.

김 기운 지수를 대표로하는 조선 修信 사용 일행은 조선이 문명권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일본에서 행렬을 이루는 동시에 風楽을 울려 나아 갔다. 근대화 된 일본 거리를 고풍스러운 복장에 기수를 눌러 서 風楽을 울리며 지나가는 광경이 연출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평소에보기 드물게 이런 진기한 모습에 일본 사람들은 오랜만에 구경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대거 몰렸다. 드디어 일본 경찰이 동원 돼 달래 적당히 조선 修信使 행렬은 일본 사람들에게 큰 구경 거리가되었다. 한마디로 환영 인파가 모인 것이 아니라,보기 드물게 흥행을 즐기려는 인파였다.

일본의 역사 학자 사사키 木克이 같은 모습의 조선 修信 사용을 가리켜 '조선이 파견 한 修信使는 쇄국 상태의 조선의 무지가 가져온 시대 착오적 해프닝 "이라고 평했다. 게다가 당시 일본 주재 영국 신문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전통적인 옷차림을 정돈 최고의 위엄을 과시 해 행진하는 조선 修信使 행렬은 화석과 같은 줄이야"

그런데 더욱 큰 해프닝이 발생했다. 일본의 장면을보고 조선 빨리 근대화를 추진 스스로를 지키고있다 부국 강병을 완수하는 목적으로 일본 측이 거액의 자금을 들여 준비 했으니 修信使 일정은 견학 코스로 막혀 있었다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의 국회 의사당, 원로원, 육군성, 해군성, 내무부, 교육부, 재경부, 경시청 등을 시찰 한 뒤 김 기운 히데 대표가 더 이상 견학 일정을 거절하겠다고 선언하고 숙소에 틀어 박혀 오로지 담배를 빨고 사실상 사보타주에 돌입 한 것이다.

강화도 조약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모리야마 시게루가 설득에 나섰다. 모리야마 금 기운 지수에 왜 견학하는 것을 싫어하는지 물었다.金綺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견학도 몸이 피곤만으로 이익이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모리야마 시게루는 "좋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원하는대로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곳은 차치 군사 및 산업 시설 만은 반드시 견학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선 빨리 부국 강병해야 "고 간절히 제안했다.

반복되는 모리야마 호소 부득이 금 기운 스와 일행은 일본의 보병, 기병, 포병의 합동 훈련과 병사 학교, 육군 포병 본 공장 등을 적당히 시찰했다. 후 金綺秀은 스스로 기록했다 "일동 記遊"일본의 부국 강병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일본이 추구하는 부국 강병은 외국과의 통상이 중요한 요소이며, 외국과 통상하면 돈은 賎しく되고, 물자 가치가 반드시 실패 할 것"

김 기운 지수는 일본이 추진하는 부국 강병은 실패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修信使 일행은 총 28 일간 머물면서 일본을 떠나게되었다. 이때 김 기운 히데 대표는 일본에서의 일정으로 너무 피곤했는지, 일본을 떠날 때, "앞으로 修信使는 15 일을 초과해서는 안된다"고 언급했다.

조선에 돌아온 김 기운 지수를 향해 고종은 기대감에 가득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고종 : 聞見 다른 단 (해외에 가서 돌아온 조선의 관리가 귀국 후에 그 나라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여 왕에게보고하는 문서) 외에 더 이야기 할 것이 있으면 자세히 말해 보이.
金綺秀 : 聞見 다른 단 외에 특히 이야기 할 것은 없습니다.
고종 : 일본은 외국과 통상하고 있는데, 각국의 사람들을 봤 느냐?
金綺秀 : 각국의 사람들은 대동 소이하며, 만약 본하더라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판별 할 수 없습니다.
고종 : 일본 양학 자 (※ 역 자주 : 서양 학문과 기술 전문가) 들어가는가?
金綺秀 : 양학가 있는지 여부 모릅니다.
고종 : 자동 起磺 (경기)라고하는 것을 봤 느냐?
金綺秀 : 볼 수 없습니다. 만약보고해도 알아 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고종 :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본 뒤 우리나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혹시 들어 본 적이 있는가?
金綺秀 : 그것은에 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고종 : 총 장단은 어떻게 했나?六穴銃 (권총) 정도 였는지?
金綺秀 : 六穴銃 볼 수 없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군사, 군인, 전신, 기차, 기선, 화폐 주조, 농기구 제조 등에 관한 많은 질문을했지만 김 기운 지수의 대답은 한결같이 이런 식이었다.

-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기억 못하고, 원래 물어 없습니다"
- "이번 방문한 것은 저쪽 (일본)의 요청에 따라 어쩔 수없이 방문한 것이다 것을 보여주기위한 것이며, 그러한 기술에 관한 것은 한번도 질문 한 적이 없습니다"

(계속)

※이 기사는 한국의 보수 논객 펀드 빌더 씨의 기고문을 일본어로 번역 한 것입니다. 한국 미디어는 이미 한국어 버전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번역의 정확성에 대한 책임은 당사에 있습니다.

2021/09/07 21:26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