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기고> 미개한 조선과 개화 한 일본의 접점이 된 조선 통신사 · 修信使 (4) = 한국이 놓친 한일 역사
일본 측은 조선 修信 사용 일행은 남하 정책을 추진하여 한반도를 노리는 러시아에 특히 조심하라고 반복 호소했다. 김 기운 수수를 비롯한 조선 修信 사용 일행이 일본 체류 중이던 1876 년 6 월 4 일에 일본 공사 "이노우에"는 金綺秀 대표 러시아의 위협에 대해 이렇게 요청했다.

"러시아가 병력을 이동 조짐이있는 것은 내가 강화도 조약에서 이미 말했다 같다. 우리 일본인이 매번 러시아에 갈 때마다 그들은 무기를 만들어 헤이룽장 (※ 역 자주 : 아무르 강 유역)에 군사력을 많이 축적하고있다. 이것은 무엇을 위협하는 것으로 될까? 귀국 (조선)을 치려고하는 것이다. 귀국는 기계 (역 자주 : 주로 무기 · 군사 시설)를 수선 , 병졸을 연마하고 방어 대책을 마련해야한다 "

나흘 후인 6 월 8 일에도 이노우에 금 기운 수수를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개최하고 세계지도 한폭을 선물로주는 동시에 또한 충고했다.

"러시아가 조선을 염두에두고있는 것은 내가 이미 반복했다 달렸다. 나는 중풍 (※ 역 자주 : 뇌졸중)이되고 멍한 사람 아니다. 귀공이 귀국하면, 내 이야기를 조정에 알려 대응 준비하는 데 진력 해 주실 것을 바란다 "

이러한 일본의 지도부에 의한 반복 된 호소에도 불구하고 金綺秀 귀국 후 러시아에 관한 내용은 고종에게 단 한마디도 언급조차하지 않았다. 강화도 조약의 사후 처리 작업으로 통상 관련 조약을 위해 1876 년 7 월 30 일 일본 대표단이 한성 (서울)에 도착했다. 조선 측 협상 대표로 조 인히 (趙寅煕)라고 인물이 나왔다. 일본 대표단은 일본 정부로부터 다음과 같다 훈령을받은 상태였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무역 관세가없는 것이 최선이지만, 조선 측에서 당연히 관세의 부과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조선 측이 요구하더라도 관세는 상품 가격의 5 % 이내의 수준에서만 협상 하라 "

일본 대표 : 개항장에서의 무역 거래시 관세를 부과해야하지만 귀국 (조선)은 관세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조선 대표 : ...

조선은 당시 쇄국 정책의 영향으로 국제 법상 관세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조차 모르는 상태였다.あきれ果て 일본 대표는 그 자리에서 조선 대표 관세의 개념을 자세히 설명 주었다. 그리고 협상을 계속했다.

일본 대표 : 양국 간 교역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상호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떻습니까?
조선 대표 : 일본 제품에 조선이 관세를 부과하지 않으면 일본도 조선 제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것은 틀림 없는가?
일본 대표 : 그렇다.

조선 대표는 양측이 무관세 동일한 조건이라면 조선이 손해를 보는 일은 없다고 판단 해 그대로 받아들이 고 말했다. 이후 일본 제품은 무관세로 한국에 몰려 오는 결과를 초래하게되었다.

조선의 지도부는 잠시 후 청나라에서 "외국과 무역 할 때 수입 제품에 관세를 징수하는 것은 당연한 국제 관례"라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일본과의 관세 협정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사실에야 깨달을 수있게되었다.

김 기운 지수를 대표로하는 조선 修信 사용이 귀국 한 후에도 조선은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실망감은 커졌다. 게다가 당시 러시아와 패권을 경쟁 영국 또한 국제 정세에 너무 무식한 조선의 형편에 답답함을 느끼게되었다. 보다 못한 영국은 결국 김 홍지뿌 (김홍집)를 대표로하는 제 2 차 조선 修信使 (1880 년)의 방문시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이렇게 압력을 가했다.

"조선은 당신들 (중국)의 속국 이니 당신들의 이야기는 조금 듣는 것 같다. 러시아를 경계해야한다는 내용으로 책을 쓰고 조선에 전달 해달라"

이는 이홍장은 일본에 주재하는 청국 공사 무엇 如璋와 참사관 황준헌에 "러시아에 경계하라고 책을 쓰고 조선 修信 사용 대표 김 히로시 집에 건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해서 생긴 것이 바로 "조선 책략"라고 책이다.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친 중국, 결 일본, 리안 미국 (중국에 친밀감,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계)'라는 외교 정책을 펼치고 서양의 기술을 배워 부국 강병을 해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책에서는 불이 집이 전소하게해도 느긋 처마 밑에 앉아 짹짹 제비와 참새를 조선에 비유 한 '연작 處堂 "도 언급되었다.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조선을 흔들 흔들 느낌 바라보고 있는데, 조선인 만 정말 절박 재난을 이해할 수 없다는 모멸적인 지적했다.

"강화도 조약"체결에 따른 일본과의 통상 조약에서 조선 측 협상 대표라고 나온 인물이 관세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황당한 꼴에서 청나라 는 "그 녀석 (조선)을 더 이상 아 방치 해 두어서는 더욱 중요한이 생길 것이다"라고 생각을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더욱 강화했다.

청나라는 원세개에 이어 '馬建常'과 '메렌도루후 (Paul Georg von Möllendorff)'이란 인물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재정과 외교에 각각 간섭 시키도록했다. "메렌도루후"는 조선에서 "협력 辨」(외교 당국의 차관급)의 직위까지 승진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에 따라 1876 년에 부산 항구가 개항하여 1880 년에 원산 (元山) 항구가 개항하여 1883 년에는 인천 (인천 제물포) 항구가 개항했다. 이 중 원산항 개항 당시의 러시아와 패권 다툼을하고 있던 영국의 대 러시아 견제 정책을 일본이 반영 추진 한 결과였다.

동서고금 국가의 불행은 무지와 오판으로 시작된다. 성리학 · 주자학이 세상에서 최고의 학문이며, 명나라의 자취를 이은 조선이 작은 중국으로 세계 문명의 중심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조선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안타까운 것은 21 세기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한심 과거 조선이 그립고, 그 조선으로 회귀 가려고하는 것인지, 매일 같이 반일을 통곡 반미를 주장하는 공산주의 중국 사대주의의 본능 (DNA)를 드러내는 야만인이 주변에 넘쳐 돌아가고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야만인)는 겉보기에만 스마트 폰 등의 문명의이기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은 조선 시대와 달리없는 성리학 적 · 주자학적인 사고 회로에 가득차있는 상태 다.

오늘의 한국이 특히 외교 안보 분야에서 큰 위기에 직면 한 이유는 무지와 오판을 함께 갖춘 문명의 탈을 쓴 조선 시대의 수준 그대로의 사람들이 주변에 흘러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끝)

※이 기사는 한국의 보수 논객 펀드 빌더 씨의 기고문을 일본어로 번역 한 것입니다. 한국 미디어는 이미 한국어 버전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번역의 정확성에 대한 책임은 당사에 있습니다.

2021/09/09 21:28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