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해설> 일본에도 연고가 있는 한국의 국민적 시인, 윤동주의 발자국이란?
한국의 국민적 시인 윤동주(윤동주, 1917~1945).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은 없을 만큼 유명하지만, 일본에도 연고가 있는 인물이다. 이달 11일 일본에 유학했을 때 배운 도시사 대학의 이마데가와 캠퍼스(교토시 가미교구)에서 윤의 내일에 맞춘 헌화식이 열린다.

윤은 중화민국 시대의 만주·간도의 태생. 경성부(현·서울)의 영희전문학교(현·연세대)를 졸업 후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 도쿄의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 전과에 입학했다. 그 후, 도시샤 대학 문학부 영문과 전과에 편입했다.

전전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는 황국신 민화를 진행하기 위해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되어 이름에 대해서도 민족성을 빼앗는 창씨 개명이 강제되었다. 윤일가도 1940년 씨를 '히라누마'로 하는 창씨 신고를 제출하고 있다.

윤은 동지사 대재학 중 한글에서 시나 일기를 쓰고 있던 것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관련됐다는 의심을 받고 체포됐다. 그러나 이것은 윤의 죄장의 일부를 과대하게 전전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윤의 체포장은 3개 있었다고 되어, 「서양 사상이 농후」라고 하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고 되어 있다. 1944년 2월, 윤은 교토 지법에서 “일본 국가가 금지하는 사상을 선전·선동했다”며 징역 2년의 실형 판결이 전해졌다. 그 후 후쿠오카 감옥에 수감되어 다음 해인 1945년 2월 윤은 27세의 젊음으로 옥사했다.

윤의 사후, 1947년에 한국 미디어의 경향 신문에 윤의 작품 「쉬운 글씨」가 소개되어, 윤에 대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 다음 1848년에는 시와 산문을 모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어 민족시인, 저항시인 등으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윤을 자고 1968년에는 서울에 있는 모교 연세대에 윤동주시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윤의 작품은 한국의 민족주의 교육에 도입되어 청년들에게도 인지도가 퍼졌다. 한때 한 문학평론가가 한국의 2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한국의 시인 중에서 좋아하는 3명을 들도록 요구했는데, 3명 중 1명이 윤의 이름을 들었다.

윤의 작품은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팬들은 일본에도 많다. 또 2017년에는 윤의 평생을 그린 영화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윤동주의 생애~'가 전년 한국에서의 공개에 이어 일본 전국에서 상영됐다. 교토 조형 예술 대학(현 교토 예술 대학)의 고원 캠퍼스 내에는, 윤이 한때 하숙하고 있던 「다케다 아파트」의 터가 있어, 윤을 들고 2006년, 캠퍼스 내에 윤의 작품 「서시 '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또 다케다 아파트에서 하숙 생활을 보냈던 윤의 모습을 아파트를 방문한 윤의 삼촌은 한때 “독서에 너무 열중해 너무 안색이 푸르게 되어 있는 것을 나는 매우 걱정했다. 방에서 추위도 잊고 심야 2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해…

도시사대의 이마데가와 캠퍼스에도 윤의 시비가 있어, 동대의 졸업생들로 만드는 「윤동주를 끓는 모임」과 「도시사 코리아 동창회」는 매년, 윤의 내일(2월 16일) 에 맞춰 헌화식과 강연회를 개최해 왔다. 신형 코로나바이러스의 유행으로 2020년을 마지막으로 강연회는 겨냥해 왔지만 올해는 3년 만에 실시된다. 강연회에서는 사제의 이다 이즈미씨가 「『하늘(風)과 별과 시』 초판책에 보는 윤동주의 모습」의 연제로 말한다.

한편, 교토 예술 대학은 2021년 3월, 홍보과 발행의 통신으로 윤을 추도하는 헌화식을 집행한 것을 보고하면서, 윤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 “단지 과거의 일민족의 비관과 잘못을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 인류에 공통되는 '인간의 죄'를 고발해, 극복하려고 한 윤동주의 목소리는, 역사와 함께 '과거'가 되어 버린다 류의 것은 결코 아니고, 인류 전체의 죄성이 사라질 수 있을 때까지, 아니, 사라진 후에도, 이번에는 희망과 평화의 목소리로서 우리에게 계속 울려 퍼질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2023/02/08 13:19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