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Don
- English:Shin Don
- Korean:신돈
- Original Network: MBC(2005)
- Aired: 2005/09/24 - 2006/05/07
Cast
Summary&Synopsis
신돈은 드라마입니다. 방송 개시는 2005-09-24입니다. 방송 종료는 2006-05-07입니다. 방송국은 MBC(2005)입니다.
한국의 차 사이를 뜨겁게 한 리얼 성공 스토리. 고려 후기. 기울어진 고려를 다시 한 사람이 “신동”
(송창민). 그는 천성의 현명함으로 고려의 31대 국왕 정복왕을 도와 전 국민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꿈꾸고 있다.恭愍王는 신동과 사랑하는 魯国姫
헤)의 도움을 받아 한 여성을 사랑하는 남자로서,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 한껏 살아간다.魯国姫는 전 아침 황족의 딸로 恭愍王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사랑하는 그를 위해 자신의 나라를
버려 고려의 개혁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 한국 드라마 '신동'은 실력파 베테랑 배우 송창민, 정보석의 두 사람에게 'CM계의 별' 서지혜가 열연한 화제작
. 고려시대 파세만장의 인생을 보낸 "신동"이라는 인물을 그린 특별기획 드라마. 제작비 17억엔을 들인 초대형 시대극이다.
신돈(辛旽, 1323년 1월 21일(1323-01-21) 고려국 경상도 영산 출생 ~ 1371년 8월 21일(음력 1371년 7월 11일)
고려국 양광도 수주에서 사형 집행)은 고려 말의 승려 출신 정치가이다. 법명은 편조(遍照)로, 신(辛)은 속성이고 돈(旽)은 환속(還俗)하고
나서 바꾼 이름이다. 자(字)는 요공(耀空), 호(號)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본관은 영산이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에서 대족(大族)의
서자로 태어나 승려가 되었고 매골승(埋骨僧)과 떠돌이 승려로서 살았다. 승려로 살면서도 신도를 신분에 따라 차별 대우하지 않아 신도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칭송받았고 개경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공민왕에게 등용되어 환속 후 1365년(공민왕 14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와
감찰사판사(監察司判事)와 서운관판사(書雲觀判事)를 겸직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보급하고 양인(良人)이 노비가 된
자들을 석방시켰으며 성균관을 중건(重建)하고 공자를 국사(國師)로 격상시키는 개혁정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반발과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공민왕에게 제거되었다. 그 뒤 1371년 7월 수주(水州)로 유배되었다가 역모를 꾸민다는 익명으로 된
투서(投書) 탓에 참수되었다. 급진적인 역성혁명을 추진하던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혁명의 정당성을 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결국 고려 우왕을 처형시키는데 명분으로 사용(폐가립진)됐으나, 현재 학계에선 신진사대부세력들의 고려왕조를 장악하기
위한 날조사건이라 추정한다.
한국의 차 사이를 뜨겁게 한 리얼 성공 스토리. 고려 후기. 기울어진 고려를 다시 한 사람이 “신동”
(송창민). 그는 천성의 현명함으로 고려의 31대 국왕 정복왕을 도와 전 국민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꿈꾸고 있다.恭愍王는 신동과 사랑하는 魯国姫
헤)의 도움을 받아 한 여성을 사랑하는 남자로서,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 한껏 살아간다.魯国姫는 전 아침 황족의 딸로 恭愍王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사랑하는 그를 위해 자신의 나라를
버려 고려의 개혁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 한국 드라마 '신동'은 실력파 베테랑 배우 송창민, 정보석의 두 사람에게 'CM계의 별' 서지혜가 열연한 화제작
. 고려시대 파세만장의 인생을 보낸 "신동"이라는 인물을 그린 특별기획 드라마. 제작비 17억엔을 들인 초대형 시대극이다.
신돈(辛旽, 1323년 1월 21일(1323-01-21) 고려국 경상도 영산 출생 ~ 1371년 8월 21일(음력 1371년 7월 11일)
고려국 양광도 수주에서 사형 집행)은 고려 말의 승려 출신 정치가이다. 법명은 편조(遍照)로, 신(辛)은 속성이고 돈(旽)은 환속(還俗)하고
나서 바꾼 이름이다. 자(字)는 요공(耀空), 호(號)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본관은 영산이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에서 대족(大族)의
서자로 태어나 승려가 되었고 매골승(埋骨僧)과 떠돌이 승려로서 살았다. 승려로 살면서도 신도를 신분에 따라 차별 대우하지 않아 신도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칭송받았고 개경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공민왕에게 등용되어 환속 후 1365년(공민왕 14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와
감찰사판사(監察司判事)와 서운관판사(書雲觀判事)를 겸직하였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보급하고 양인(良人)이 노비가 된
자들을 석방시켰으며 성균관을 중건(重建)하고 공자를 국사(國師)로 격상시키는 개혁정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반발과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공민왕에게 제거되었다. 그 뒤 1371년 7월 수주(水州)로 유배되었다가 역모를 꾸민다는 익명으로 된
투서(投書) 탓에 참수되었다. 급진적인 역성혁명을 추진하던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혁명의 정당성을 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결국 고려 우왕을 처형시키는데 명분으로 사용(폐가립진)됐으나, 현재 학계에선 신진사대부세력들의 고려왕조를 장악하기
위한 날조사건이라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