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히스토리> 28년 전 3월 1일에 열린 한국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축제 “구 조총총부 청사의 철거 선포식”
1995년 3월 1일. 현재 서울시내에 있는 광화문광장에서는 한국의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축제가 열렸다. 70년간 계속 존재한 '한민족 말살의 상징'이라 불리는 구 조총총부청사의 철거 선포식이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구조총총부청사 앞 광장에서 열린 '광복 50주년 삼일절 기념문화축제'에서 당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오늘 삼일절 를 조선총독부청사 철거의 시작으로 한다”고 선명했다. 쾌활한 소지의 타악기 ‘쾅구리’를 울려 무수한 여러 가지 빛깔의 풍선이 하늘 높이 올랐다. 태극기를 들고 춤을 추며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이 축제를 북돋웠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역사 재건 운동'의 일환으로 구 총독부 청사의 해체를 결정해 이날 선포식을 했다. 구 조총총부의 청사 철거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추진되어 왔지만 예산 등의 문제로 좌절한 것이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는 1916년에 착공해 10년간 공사 끝에 1926년에 완성되었다.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사원정은 부지 선정 때 본래 계획하고 있던 현 서울시청의 장소를 대신해 조선과 대한제국의 심장부였던 경복궁 내에 밀려들었다. 일본 통치를 어필하고 조선왕조를 모욕하며 민족의 정신과 기력을 말살할 의도가 있었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의 청사는 백성이 왕이었던 궁을 보이지 않도록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경복궁을 숨길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로 지어졌다. 또한 공사 과정에서 광화문을 철거하고 경복궁 전각 6806 중 4000여개를 매각해 총독부 건축 비용에 충당했다. 당초 예상했던 비용의 2배 이상에 걸쳐 완성된 조선총독부 청사는 당시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합쳐 가장 큰 건축물로 동양 제일의 근대 건축물이 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표면과 달리 조선총독부는 민족에게 치욕과 상처를 주는 공간이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총독부청사의 각 지하실에 두께 15㎝의 무거운 철문을 마련해 방음시설을 겸비한 고문실까지 만들었다. 한국인의 입장으로서 골신에 대처하는 역사의 상처를 안은 대표적인 ‘네거티브 문화재’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청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이 접수하여 사용했다. 그때 미군이 붙인 이름이 '캐피탈 홀'로 당시 한국인은 이를 '중앙청'으로 직역해 그 이름을 수십년간 사용했다. 1982년까지 정부청사로 사용되었고 내부 보수를 거쳐 1986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청사 철거 선포식 이후 실제 해체 작업은 같은 해 8월 15일에 시작되었다. 당시 주동식 문화체육부(부는 일본의 성에 상당) 장관은 구조총총부청사의 중앙돔 첨탑 분리를 앞두고 해방 50년 만에 이뤄지는 일본 통치의 상징 제거를 호국영령에게 알린다. 같은 내용의 '고유문'을 낭독했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동족의 생존까지 빼앗은 식민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청사를 철거하고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되찾아 통일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궁 복원 작업과 새로운 문화대로 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을 엄숙하게 말한다.”

그 후 큰 크레인이 조선총독부 청사의 첨탑 상부를 들어올리기 시작하자 광장에 모인 5만 명의 시민들이 일제히 환호해 수백발의 폭죽이 소리를 울렸다. 첨탑이 크레인에 걸려 지상으로 옮겨지는 동안 광화문 앞 행사장에서는 국립국학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다시 방문한 빛'이 엄격히 울려 그 의미를 되돌아봤다.

그리고 철거 작업은 1996년 11월 전체 건물을 폭파하는 공법으로 모든 것을 마쳤다. 1995년 3월 1일에 한국 정부가 구 조총총부 청사 철거를 공식 선포하면, 일본 정부는 이전 비용을 모두 부담하고 통째로 구입하겠다고 제안하고, 철거 전에 청사의 마지막을 보려고 일본인 관광객 에서 갚았다는 광경도 있었다.

철거된 첨탑과 철거 과정에서 나온 부재는 충천남도 천안시의 독립기념관 야외에 조성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으로 옮겨져 그곳이 일반적인 전시공원과는 다른 것은 '방치'를 컨셉으로 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독립기념관이 일본 통치의 나머지로 민족의 치욕의 역사를 전시하지만 냉우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청사의 상징으로 여겨진 첨탑이 지하 5m에 묻혀 관람객이 위에서 내려다보이도록 전시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2023/03/04 09:23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