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행> “타임 슬립여행”의 성지가 된 목포
<한국여행> “타임 슬립여행”의 성지가 된 목포
<한국여행> “타임 슬립여행”의 성지가 된 목포
<한국여행> “타임 슬립여행”의 성지가 된 목포
<한국여행> “타임 슬립여행”의 성지가 된 목포
<한국여행> “타임 슬립여행”의 성지가 된 목포
모든 것이 차례로 바뀌어가는 한국에서 100년 전의 지도를 가지고 걸어도 그대로 걸을 수 있는 곳, 철라남도(전라남도) 모포(목포)시. 120년 전 상태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도시다.

목포는 1897년 대한제국의 탄생과 함께 자발적으로 개항했다. 그 후 일본은 수탈을 목적으로 목포를 발전시켰다. 쌀과 면화, 소금, 김 등이 목포를 통해 빼앗겨가는 동시에 민족의 영혼도 말살되어 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목포는 다른 도시에 밀려 정체기를 맞이한다. 개발이 늦어 방치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목포는 일본 통치 시대의 건물이나 가옥이 구 도심에 남아 있다. 개발 지연이 역사를 지킨 것이다. 지금은 대체 불가능한 복고풍 관광지가 된 목포는 근대의 역사와 현대의 로망이 만들어내는 매력을 발하고 있다.

목포는 나라를 잃은 조선인의 땀과 눈물과 함께 성장해 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 목포는 남촌과 북촌에 156가구 600명이 살았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2년에는 인구 6만명을 돌파하여 전국 6대 도시로 발전. 당시 일본이 호남(호남) 지역(현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지역)의 자원을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목포는 대부분 논이나 갯벌이므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특별히 없었다. 지금 존재하는 토지의 대부분은 1899년부터 시작된 개척과 매립을 통해 생긴 것이다. 새로운 토지에는 일본인이 살았다. 노동 등에 의해 온 조선인은 살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무덤을 이동시켜 사는 장소를 만들었다.

목포의 이미지는 '강하고 거친'이다. 실제로 여기에는 애절한 사정이 있다. 목포 산업의 중심지는 역에서 도보로 4분 정도 거리에 있는 오차로였다. 목포역, 조선인촌, 일본인촌, 목포항 등에 이은 5개의 길이 교차한 지점이다.

번화가인 오차로 주변에는 식당, 사진관, 여관, 잡화점 등이 즐비하고 있지만 일본인과 조선인이 섞여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도 자주 있었다. 일본의 착취와 수탈이 자주 있었지만, 나라를 잃은 탓에 일본인과 막상이 있어도 조선인은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당시는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시기였다. 조선인은 일본에 굴하지 않고 소작 쟁의나 노동운동으로 맞서었다. 목포 사람들의 구부러지지 않는 기질을 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목포여행은 근대역사문화공간을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금도 옛 도로의 구조와 보존 가치가 높은 근대 건축물이 100년 정도 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1929년에 지어진 목포공립 심산초등학교(현 유달초등학교)의 강당으로 시작되어 목포대중음악전당(구호남은행)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문화재가 늘어서 있다.

주목해야 할 건축물 중에는 일본식 가옥과 구 목포 부립 병원 관사, 구 목포 일본 그리스도 교회, 상가 주택, 구 동아부인 상회 목포 지점, 목포 해안의 붉은 벽돌 창고 등이다. 굳이 찾지 않아도 걷고 있으면 간판 등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여기저기를 걸으면서 과거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목포근대역사관의 1, 2관은 반드시 봐야 할 건축물이다. 구 도심을 걷고 있으면 높은 곳에 위치한 서양식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이지만, 거기가 근대 역사관 1관(구 목포 일본 영사관)이다. 1900년 1월에 착공해 12월에 완공한 건물로 유달산 노적봉의 밑단에 세워져 있다. 당시의 외관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뛰어나 지금은 목포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고 있다.

역사관 앞에서 목포시내를 내려다보면 1㎞ 정도 앞서 목포항과 푹 열린 시내의 모습이 눈에 뜬다. 풍수지리를 잘 모르더라도 풍수적으로 좋은 장소라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체감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을 오랫동안 통치하겠다는 욕망을 담아 이 건물을 세웠다. 붉은 벽돌 건물 외부에는 흰 벽돌을 사용한 욱일기 모양이 새겨져 있다.

내부에 들어가면 대리석 벽난로를 비롯해 인력거, 면전기, '결전'이라고 적힌 도자기 식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목포 해방에 관한 이야기를 둘러싼 자료실이나 일본 통치 시대의 유니폼과 모자, 안경 등 착용해 만세 운동을 체험할 수 있는 코너도 있다.

여기에서 도보로 4분 정도 가면 구 동양 타쿠쇼쿠 주식회사 목포 지점의 건물이 있다. 지금은 목포 근대 역사관 2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요타쿠쇼 주식회사의 주요 업무는 조선의 토지와 양식곡 등의 자원을 옮겨가는 것이었다. 일본의 '약탈'을 상징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깔끔한 회색 콘크리트의 외관이 고압적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철거 위기를 맞이한 적도 있었다. 목포해역 방어사령부 헌병대가 사용했지만 빈 건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1995년 서울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와 함께 일본 통치 시대의 상징적인 장소로 선정된 이 장소도 소유주였던 해군이 파괴하려 했다. 철거 작업을 시작한 유압 굴삭기가 부속된 건물을 부수기 시작했을 때 목포문화원에서 일하던 직원이 달려 몸을 펴고 멈춘 것이다. 역사의 현장을 지키려는 노력 덕분에 건물은 같은 해 지정 문화재가 되어 2006년에는 목포 근대 역사관으로 개관해 지금에 이른다.

목포음악의 전당이 된 건물은 1929년에 지어진 호남은행 목포지점을 리뉴얼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건축물로 유일하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역의 부자들이 설립해, 운영해 일본에 맞서는 민족의 자본의 힘을 기르려고 노력한 흔적이 되는 건물로, 그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목포대중음악전당에 가면 '국민적 디바' 이난영의 히트곡 '목포의 눈물' 음반을 비롯해 일본 통치 시대 축음기, 화려한 무대 의상과 악기 등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음반 카페와 근대 문화 VR 체험, 목포의 대중 음악 스토리 등 볼거리에서 무심코 멈춰 버린다.

2023/03/22 13:14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