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에 있는 아동양호시설 '목포공생원'을 방문했다. 원을 운영하는 재단 설립 95주년 기념식전에 참석한 윤 대통령은 앞으로도 공생원이 한일 우정의 상징으로 발전해
가기를 바라며 "정부도 사회적 약자를 더욱 두껍게 지원하는 약자 복지를 실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다우치씨는 1912년, 고치시 출생. 일본 통치 시대인 1938년 목포에서
기독교 전도사인 윤치호(윤치호)씨와 결혼해 이후 윤학차(윤학자)라고 자칭했다. 당시 서민의 생활은 괴롭고 고아도 늘어나는 가운데 다우치 씨는 윤씨가 목포에서 시작
고아원 '목포공생원' 활동에 종사해 부부는 많은 고아의 부모가 되었다. 「공생원」은 그 후 교육 기능을 갖춘 시설로 발전해 갔다. 동원에는 지금도 40명 정도의 아이
그가 살아. 1946년, 타우치씨는 어머니와 2명의 아이를 데리고 일단은 고향의 고치에 끌어 올렸지만, 목포에 남겨 온 남편이나 고아들에게의 생각이 모여, 다음 해에 어머니의 설득을 뿌리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1년 조선전쟁에서 남편이 행방불명이 된 뒤에는 그 유지를 이어 고아 구제를 위해 노력했다.
그 공적이 인정되어 1963년 한국 정부는 다나이씨에게 일본인 최초가 되는 문화
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당시 박정희(박정희) 대통령은 다우치 씨에 대해 “우리 아이(한국 아이)를 지켜 키워준 인류 사랑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다나이 씨는
수장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라고 생각해, 원을 지켜 왔을 뿐. 고생은 아이들이 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1968년에 병으로 쓰러져 56세에 평생을 닫을 때까지 3000명
고아를 키웠다. 사망했을 때, 목포시는 시민장을 집행해, 약 3만명이 참렬했다. 한국 고아를 위해 바친 다나이 씨의 생애는 1992년 2월 당시 일본 TV 계열에서 방송되어
있던 인물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알고 있을 생각?!」로 소개되어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일 합작 영화 「사랑의 묵시록」(1995년)이 제작되었다. 제작시 고치
시민에 의한 '영화를 성공시키는 모임'이 발족해, 다액의 지원금이 모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당시 일본의 대중문화가 해금되려 하고 있으며, 이 작품은 한국 정부의 일본 대중문화 해금
인가 제1호로서 상영을 인가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 오부치 메구미 총리는 “『사랑의 계시록』의 상영이 앞으로의 한일 문화 교류의 출발점이 된 것을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우치씨의 생각은 그 후 설립된 '공생복지재단'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달 13일 원을 운영하는 이 재단의 창립 95주년 기념 행사가 동원에서 열리고 윤 대통령을 비롯해
, 부인 김건희(김건희) 씨, 김용록 전라남도지사, 박홍룡(박홍율) 목포시장, 동원 직원 등 약 500명이 참석했다. 일본에서도 자민당의 위토 정사로의
멤버 일본 대사관의 구마가야 나오키 총괄 공사 등 약 100명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식전에서 다우치 씨에 대해
모니(어머니)』였다. 그 사랑은 한·일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밝혔다. 또한 윤 대통령은 목포가 있는 전라남도 출신 김대중 대통령과 고부치 에미 총리(어느
당시)에 의한 한일공동선언에서 올해 25년을 맞이한 것을 접하면서 동선언은 원의 활동을 보면서 목포에서 자란 김씨와 동원의 활동을 잘 아는 코부치씨이기 때문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 그럼
어쨌든 선언은 동원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작년은 다우치씨의 탄생 110주년을 맞이해 동원에서 기념식전이 열렸다. 현재의 한일 관계는 그 때보다 개선되어 정계
하지 않고 재계, 그리고 민간끼리의 교류도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고아의 어머니'의 사랑은 현재의 한일관계로 계승되고 있다.
2023/10/18 11:00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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