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기고> 반일 왜곡 반일 날조가 고정 정착한 한국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목소리 = 군함도의 거짓말과 진실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는 성경(聖經) 문구는 흔히, 불의(不義)에 영합하여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言論을 빗댄다. 時代가 좋아져 오늘날 韓國 言論들은 '言論의 自由'를 100% 만끽(滿喫)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除外되는 분야가 있다. 日本 관련 분야다. 특히 과거사 관련이 그렇다. 팩트를 알면서도 愚衆(많은 韓國人)으로부터의 비난(非難)과 공격이 두려워 '진실 보도를 안 하는 언론’과, 언론 스스로가 病的 反日에 빠져 '진실 보도 기능을 아예 상실한 언론’으로 大別될 것 같다. 前者는 비겁(卑怯)한 언론이고, 後者는 미개(未開)한 언론이다. 언젠가, 돌들이 소리쳐 진실(眞實)의 둑이 터질 때, 卑怯하거나 未開했던 이러한 韓國 언론들은 부끄러워질 것이다.

日帝時代 징용 관련해, 韓國 언론이 전하지 않는 팩트를 몇몇 경험자의 증언을 통해 엿보고자 한다. 2019년 12월 20일字 日本 슈칸포스트(週刊ポスト)는 韓國人 징용 경험자 몇 명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보도했다. 그 중 ‘최한영’(崔漢永, 93세) 氏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 쪽이 한국인보다 좋은 사람이 많았어. 탄광 근무 시절 일본인들은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 나는 15살 때 자원하여 일본으로 갔어. 부친이 상하이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었는데, 징벌로 일본에서 강제노동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거든. 우리는 9명의 대가족이므로 아버지가 없으면 곤란했어. 그래서 내가 나이를 18살로 속이고 대신해서 일본에 가겠다고 손을 들었지. 일했던 곳은 후쿠오카(福岡)현 이즈시카(飯塚)市에 있는 미쓰비시(三菱) 탄광이었어…일본인과 조선인은 똑같은 노동환경에서 일했고, 똑같은 임금을 받았어. 조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거나 폭행당한 일도 없었어. 일본인 고참이 나를 특별히 귀여워해 줘서 ‘내 딸과 결혼하지 않을래?’라는 말도 들었어.”

20살 때 여수(麗水)군청으로부터 징용명령을 받아 사가(佐賀)県으로 건너간 ‘김병철’(金炳鐵, 98세) 氏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니시마쓰우라(西松浦)郡에 있는 ‘우라사키’(ウラサキ) 조선소에서 일했어. 자재과(資材課)에 근무했는데, 공장에서 나오는 고철을 모으는 일을 했어. 조선소에서 일하는 2000여 명 중에 700여 명이 조선인이었어. 아침 9시부터 오후 4~5시까지 일했고 일요일은 휴무였어. 그곳은 副食이 좋아서 종종 '방어'와 '날치'가 식탁에 1~2마리 나왔어. (전쟁 말기로 식량사정이 안 좋아서) 쌀과 보리를 섞은 밥 한 그릇이 원칙이었어. 어느 날은 배가 고파 밥을 훔쳐 먹다가 일본인 관리에게 들켜서 얻어 맞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룰(규정)을 어긴 것이므로 대단한 일이라고는 생각 안 해. 기본적으로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학대한 일은 없어.”

오사카(大阪)의 구보타(クボタ) 철공소에서 근무한 ‘손의봉’(孫義奉, 93세) 氏는 이렇게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500명 정도가 구보타 철공소에 배치되었어. 일본인으로부터 차별받거나, 노예처럼 대접받은 기억은 없어. 거기서 철재를 나르는 일만 했어. 가장 무서운 것은 미군의 공습이었어. 밤에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면 공습 경보가 울리고 모두들 도망치려고 허둥댔지. 도저히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손의봉 씨와 동향인 ‘강채구’(姜彩求, 94세) 氏는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미군 공습이 심해져 공원(工員)들이 뿔뿔히 흩어졌어. 나는 효고(兵庫)현 숲 속으로 도망갔어. 한국 대법원에서 징용공 출신에 대해 위자료 1억 원씩을 지불하라고 명령 내렸는데, 나는 일본에서 그 정도 금액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보상은 원하지만, (고액 보상금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돈을 빨아들이는 청소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지.(웃음)”

2020년 10월 19일자 일본 세카이닛포(世界日報)는 과거 군함도(軍艦島)에 거주했던 주민들의 증언을 소개했다. 戰後 1949년 군함도(軍艦島)에서 출생한 ‘이와사키 마쓰코’(岩崎松子) 氏는 자신의 큰언니가 해준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큰언니는 소학교 때, 일본 이름으로 ‘나가마타 준’(長又純), ‘나카하라 다마에’(長原 たまえ)라는 조선인 동급생 여자 아이들과 사이좋게 놀았고, 조선인에 대한 이지메는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섬에서는 축제도 있었는데 조선인 여성들이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자기 나라 춤을 추기도 했으며, 조선인 남성들도 미코시(神輿, 일본 전통가마)를 들고, 시시마이(獅子舞, 사자춤)로 섬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소학교(小學校) 시절을 군함도(軍艦島)에서 보낸 ‘나카무라 요이치’(中村陽一, 83세) 氏는, 탄광에서 일하던 朝鮮人들이 종전(終戰)을 맞아 귀국 길에 오를 때 배웅하러 나온 日本人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조선인으로부터 신세를 졌다는 말과 함께 사과가 가득 든 상자를 받은 일본인도 있었고, 반대로, 귀국하는 조선인에게 선물을 준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승선한 그 사람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처음 알고 깜짝 놀란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제일의 인구밀도를 기록한 그 작은 섬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서로 가족처럼 살았습니다.”

‘피해자도 거짓말을 한다’는 제목으로 日本 ‘모랄로지 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시된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레이타쿠大(麗澤大) 객원교수의 글은 韓國人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내용 중 일부는 이렇다.

<한국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은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을 통해,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군이 관리해 온 공창이라는 說을 다양한 근거를 열거하며 실증했다.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은 한국에서 거센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역사학계는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좌파 운동가들이나 직업적 반일 학자들이 이영훈 전 교수 등을 배제한 채 일방적인 토론회 개최를 반복했고 동시에 ‘반일종족주의’에 대한 반론이 담긴 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이에, 이영훈 전 교수는 再반박 차원에서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책 내용 중에는 피해자들이 거짓말을 함으로써 日·韓 관계가 악화된 경우로서 戰時 노동자들의 거짓말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中略)

이영훈 전 교수는 자신이 직접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총 57명의 韓國人 戰時 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중 군인 및 군속이 20명이었다. 이들은 비교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며 기억에도 일관성이 있었다고 했다. 나머지 37명의 노무자 출신들은 대체로 무학(無學)이었으며 기억에 일관성이 없고, 때로는 허위나 환영이 뒤섞여 있었다고 했다. 또 “공장에서 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인 감독관을 동료 세 사람이 때려죽인 후 강에 던져 버렸다”는 식의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정직한 이들도 몇 사람 있었다고 한다. 어느 두 사람은 “엄중한 시기에 고된 노동이었지만 생활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됐고, 이후의 삶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고 말하면서, 보상을 위해 신고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내가 돈 벌러 간 것인데 보상 신고를 왜 하느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많은 증언들은 분명히 거짓말들이 섞여 있었다고 했다. 이영훈 전 교수가 자국민 피해자들의 거짓말에 한탄하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그들은 정부가 주겠다고 하는 보상을 철저히 의식하면서 “임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회고에서는 그러한 주장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 반드시 등장합니다. “일요일에는 무엇을 했습니까?”라고 물으면 “가까운 마을에 외출해 팥죽도 먹고 극장에도 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 돈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라고 물으면 그제서야 “그 정도의 돈은 받았다”고 시인합니다.

이런 사례와는 달리 완고하게 주장을 관철시키는 이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울주군 출신의 어떤 이는 “2년 계약으로 홋카이도 탄광에 갔지만, 계약을 연장해 3년 6개월 간 있었다”고 말하며 이후 “돈은 한 푼도 받지 못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 연구자가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계약을 연장한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그 이는 “아, 연장하라고 강제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고생만 하고 돌아왔다”고 답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자기 증언에 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경위에 관한 기억에도 모순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터뷰 초반에는 눈물을 흘리며 “강제로 끌려갔다”고 말했는데, 인터뷰를 진행하자 강제 연행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본에 가고 싶어서 밀항선에 올랐는데, 사기를 당해 실패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後略) 』

이영훈 전 교수는 많은 피해자들이 눈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고 솔직하게 썼다. 나 역시,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호소하고 나선 前위안부 김학순 씨가 자신의 경력과 관련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매우 크게 탄식한 기억을 갖고 있다. 현재 이영훈 전 교수 등은 前위안부 및 前징용공과 그 가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으며,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영훈 전 교수는 자신이 인터뷰한 수십 명의 戰時 노동자 출신 가운데 多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며, 소송을 건 원고 중 네 명의 실명을 언급하며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했다. 이영훈 전 교수는 “신체적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반일종족주의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것이 이 나라 발전에 도움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後略) >

불순(不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혹은, 비뚤어진 자신의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고(無辜)한 이웃 나라를 헐뜯고 모함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日本을 악(惡)으로 만들어놓고자 덤벼드는 오늘날 韓國人들의 집요한 '反日 프로파간다가'는 이미 ‘지독한 수준’을 넘어 ‘사악(邪惡)한 수준’에 도달했다. 명예훼손이나 誣告 등의 범죄행위로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다. 동시에, 문명국가에서 금지하는 인종차별(人種差別) 양상을 띤다. 韓國 언론의 卑怯한 행태를 등에 업은 韓國人들의 '反日 프로파간다'가 여전히 발호(跋扈)하는 限, 韓國의 교양(敎養) 수준은 영원토록 未開國 수준을 맴돌 수밖에 없다.

(※본 글 中, 日本언론 보도 내용을 引用한 부분은, ‘미디어워치’ 게시 글을 참조했습니다)
2021/07/30 21:13 KST